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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속으로... 글자 확대 글자 축소
       날짜 : 08-12-02 16:11     조회 : 4927    
  파일있음 아이콘 세상속으로.hwp (37.5K), Down : 47, 2008-12-02 16:23:45
 


세상속으로...

                                                                      


나는 소위 이 사회에서 말하는 장애인이다.

그것도 그냥 장애인이 아닌 전신마비의 중증장애인...


9년 전 저녁의 밤늦은 퇴근길, 회사동료차를 타고 회사 정문을 나선지 채 2분도 되지 않은 급커브 길에 커브를 틀지 못해 차가 전복되었다. 그 순간 나는 목을 다쳐 목 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이 끊기는 사고로 그만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다. 사고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동료운전자의 피로운전 때문이었다.


설상가상 회사동료는 자동차보험의 책임보험만 들고 있었고, 회사에서는 퇴근길 교통사고는 산재적용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년여의 병원생활 후 나에게 남겨진 것은 혼자서는 밀 수 도 없는 휠체어 한대와 목 신경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장판정의 장애인등록증이었고, 그 이후 난 장애와 경제난의 이중고에 부딪치며, 이 사회에서 살기위해 치열한 일인서바이벌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신마비장애... 

사고당시 차가 전복이 되면서, 어딘가에 목을 부딪쳤고, 그 순간 목뼈가 으스러지며, 목 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의 손상으로 손과 발이 마비되었다. 하지만 장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 소변 기능도 마비되어서 소변이 차면 누군가가 방광에 줄을 집어 넣어서 소변을 강제(?)로 빼내야 했고, 대변 또한 3일에 한번씩 약을 써 침대에 누워서 봐야하며, 그 모든 것을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 해주셨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복병이 있었다.


 욕창...목 이하로는 감각이 없다보니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오래 않아있으면, 눌려있는 부위의 피가 통하지 않아서 살이 괴사하면서 천천히 썩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썩어 들어가도 마비된 감각으로 인해서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중증장애인의 중도 사망 중 1위가 심한 욕창 때문이라고도 한다.

사고당시 내 나이가 27살이었다.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물 한모금도 마실 수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 장애의 특성은 정신은 멀쩡하고, 별다른 통증도 없는데 아무것도...아주 가벼운 종이 한 장 드는 것도 할 수없다는 것인데...한마디로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다.


퇴원 후 꼬 밖 1년 반을 침대에 누워서 살았다. 그 당시는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다보니 아침에 눈을 뜨면 으례 tv를 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늦게 tv를 끄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고, 그렇게 1년을 넘다보니 서서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정말로 무의미한 인생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고, 창살 없는 감옥의 독방에 갇혀 사는 느낌이 들었다.


빠삐용...

그 이후 나는 어떠해서든 그 독방(?)을 탈출하고 싶었다.

저 창문 밖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자기의 생활을 누리면서 직장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가고 싶은 곳도 다니며 먹고 싶은 음식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런 평범함을 즐기지만, 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조금씩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장애인이 된 이후 누구하나 장애인복지나 시책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볼 곳도 없었다. 그래서 시청과 보건소에 연락하여 자원봉사자 연결을 몇 차례 부탁하였지만 "알았으니 기다려라"는 소리와 함께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무 연락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저렴한 가격의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인터넷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하여도 장애 관련 정보 및 복지 시책을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아 알지 못하였으나 인터넷을 계기로 그때까지 몰랐던 많은 장애관련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 장애문제와 복지 시책이 경제 성장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조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국내의 복지 관련 서적과 장애관련 복지와 역사에 대해 인터넷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조금 공부를 하게 되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많은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많은 장애관련 기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의를 하였지만 대부분 혼자서 활동 가능한 장애인만을 선호하였고,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보니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장애관련 단체나 장애관련 서비스가 주로 서울시에 집중되어 있어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떠한 활동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생각 끝에 2001년 2월, 서울 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재활 치료로 입원 신청을 하고, 그해 4월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재활치료도 중요하지만 사회활동을 위한 목적이 크기 때문에 입원 즉시 내가 가지고 있던 조금 남은 돈으로 활동 보조인을 고용하였고 그렇게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우선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다시 장애관련 단체를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하였고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관과 서울시의 후원으로 서울시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 전환을 위한 일일교사를 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매주 토요일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3교시 수업을 진행하였고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장애체험, 체험 후 토론식으로 진행을 하였다. 4개월여 동안 서울시 11개 초등학교가 참여를 하여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개선에 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 자료집으로 엮어 전국 초등학교에 배포 되었다.


그 이후 장애인의상연구소 주관과 서울시 후원으로 장애인 패션쇼도 참가하고 그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장애관련 행사에 참가를 하였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동권연대와 정립회관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행 중 인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세미나를 접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바로 나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사회적인 배려와 정부의 정책만 지원된다면 비장애인과 같이 평범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라는 중증장애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나는 홍보담당을 맞아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알리기 위해서 논문을 찾아 자료를 만들어서 장애인 정책담당자를 만나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필요성을 알렸다.


그러나 국립재활원을 퇴소하면서 다시 이천으로 내려와  경제적 어려움과 지방의 특성상 다시 활동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의지가 있다 하여도 전신마비라는 장애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높은 벽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많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를 한다면 평생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방에서 절망과 후회를 하며 지낸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서 활동을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나의 활동을 보조해줄 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서비스의 개념과 지원이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활동을 도와 줄 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간병인협회에서 간병인을 고용하여야 하는데 한 달에 150만원이란 비용은 나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에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비도 알아보고, 전경련에 상무님도 만나고, 시청에 지역사회 후원도 알아보고, 여기저기 장애인단체에 문의도 해보고, 시민단체에 호소도 해보았다. 하지만 후원과 기부문화의 부재 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닌 단지 사회활동의 필요성만으로는 힘들고, 또한 일반 개인에게는 지원이 어렵다는 말과 함께 어떤 사람은 “그런 중증의 장애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요양하다보면 좋은날이 올 것이니 편하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고심 끝에 스스로 벌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보험업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사고 전 서울에서 2년여 간의 영업활동도 해보았고 보험이란 대중화된 상품에 무형의 상품이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통한 지식만 갖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생겼고, 내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보니 누구보다 더 보험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무턱대고 삼성화재 본사에 찾아갔다. 본사 앞에서 담당자와 통화한 후 만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준 다음에 나도 할 수 있으니 한번만이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활동보조인지원 이였다. 담당자는 알았다고, 한번 상의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다시 이천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해도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대뜸 찾아와서는 일하겠다고 하고서 거기다가 조건까지 내세우니 내가 생각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이천에 있는 삼성화재에 전화해 소장님을 만나 다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드린 후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일 할 테니 저에게 한 번의 기회만 주십시오. 하고 호소했다. 소장님도 처음엔 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했지만 한 달 후, 연락이 없자 다시 찾아가서 부탁드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 11월에 수원 보험연수원에서 2주의 교육과 자격시험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정말 뛸(?)듯이 기뻤다. 비록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기회를 주 엇 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였다. 수원을 왕래하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 차도 있어야하고 활동보조인이 당장에 필요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라고 했던가! 1년 전에 한 장애인 모임에서 만난분의 연락이 왔다. 현재 미인가 장애인시설에서 생활교사로 근무하다가 대학원의 사회복지 공부로 인해서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사정을 전하고 월급의 일정부분을 드리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분은 잠시 고민 끝에 허락하였고, 그렇게 직업전선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2003년 12월, 사고 후 거의 5년 만에 중증장애로 다시 직업을 같게 되었고. 2004년 1월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온 몸이 꽁꽁 얼면서도 고객을 만나러 다녔고, 전신마비장애로 어깨 아래로는 땀이 나지 않아서 체온이 쉽게 올라가 수시로 일사병을 느끼면서도 고객을 만났다. 항상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영업하느라 계단은 올라가지 못하면서도 매달 매달을 최선을 다해서 활동했다...


그러길 어느새 5년, 아직까지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직업적 자립이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항상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과 나의 목적이 단지 돈을 번다기보다 중증장애인도 자신의 노력과 사회적인 배려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또한 일각에서는 그 몸으로 얼마나 할 수 있겠어? 라며 얼마 못가서 그만 두겠지 하면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나도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무리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도 생기고 가끔 옷에다가 소변과 대변이 저절로 나와서 난처할 때도 있었고, 때론 무리한 활동으로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휠체어 타기가 너무나도 힘들 때도 있었고, 어쩌다 너무 힘들 때면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펑~펑~ 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전신마비장애가 있다고 해서 평생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안에 누워서 지내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힘들어도 사회로 나가서 내 할일을 찾아서 활동하는 게 낫겠습니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기에 실패는 두렵지 않다. 힘들어도 방안에서 아무희망도 의미도 없이 누워서 사는 것보다 조금 힘들어도 내일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힘든 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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